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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실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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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르실리 2세는 히타이트 제국을 다스린 왕으로, 그의 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와 왕비 헨티의 아들이자 아르누완다 2세의 동생이다. 아르누완다 2세가 역병으로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초 카스카족과 아르자와 왕국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군사적 능력과 외교를 통해 이를 극복했다. 그의 치세 10년 동안의 연대기가 남아 있으며, 일식과 관련된 기록도 존재한다. 무르실리 2세는 22년 이상 재위했으며, 아들 무와탈리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히타이트 제국에서 중요한 왕으로 평가받으며, 소설과 만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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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실리 2세
기본 정보
군주호히타이트
재위기원전 1322년경 - 기원전 1295년경
사망일기원전 1295년경
아버지슈필루리우마 1세
배우자 1Gassulawiya
배우자 2Danu-Hepa
자녀무와탈리 2세
하투실리 3세
할파 술피
딸 (아르차와 왕자 무슈필와의 비)
상세 정보
언어en
참고 문헌Amélie Kuhrt, The Ancient Near East: c.3000–330 BC, Volume One, Routledge, 2020, ISBN 978-1-136-75548-4, pages=230, language=en
Bryce, Trevor (1999). The Kingdom of the Hittites.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924014-9.

2. 생애

무르실리 2세는 히타이트의 왕 아르누완다 2세가 역병으로 요절한 후 왕위를 계승했다. 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1320년경 하티를 휩쓴 전염병의 희생자였다.[2] 그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티의 적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그의 치세 동안 수많은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가장 심각한 반란은 아나톨리아 산악 지대의 카스카족과 남동 터키의 아르자와 왕국에서 일어났다.[2]

무르실리 2세는 자신의 연대기 문서에 적들의 비웃음을 기록했다.[2] 그는 젊고 경험이 없었지만, 히타이트 왕권을 잡았을 때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며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였다.[2]

즉위 후 처음 2년 동안 왕국의 북쪽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카스카족을 상대로 징벌적 원정을 수행했다. 그 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르자와 왕 우하지티의 공격에 대항했다. 우하지티는 히타이트 동맹국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연대기는 또한 무르실리 2세가 카스카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려 할 때, 즉 왕이 된 지 10년째에 "태양의 징조", 즉 일식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5]

무르실리 2세의 통치 기간은 최소 22년으로 확인되지만,[4] 25년에서 27년 정도로 추정된다. 기원전 1295년경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무와탈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무르실리 2세는 히타이트 제국을 통치한 국왕 수필룰리우마 1세와 왕비 헨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르누완다 2세의 동생이었다. 형제로는 왕위 계승자 아르누완다, 이집트 왕비의 사위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암살된 잔난자, 카르케미쉬의 부왕 피야실리, 할파의 부왕 테리피누가 있었다.[4]

무르실리의 통치 기간 동안의 히타이트 제국


기원전 1321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1330년대에 히타이트인들을 휩쓴 역병으로 사망한 아르누완다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히타이트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티의 적들로부터 경멸을 받았고, 통치 초기에 수많은 반란에 직면했는데, 가장 심각한 반란은 카스카가 아나톨리아 산악지방에서 일으킨 것이었으며, 서남아시아 소아시아의 아르자와 왕국과 동부 아나톨리아의 하야사-아찌 연맹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그가 아르누완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왕이 된 경험 부족의 통치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

이 시기 무르실리의 활동으로는, 서쪽의 "세하 강 국가"에서 형제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카르키사 마을로 도망친 마나파-타르훈타를 회유하여 아군으로 만든 것, 그리고 근위대장 (''GAL MEŠEDI'')이 된 것만이 전해진다. 이윽고 수필룰리우마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은 아르누완다의 왕자, 그리고 결국 아르누완다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이렇게 원래는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낮았던 무르실리에게 왕위가 돌아왔다. "무르실리"는 아마도 즉위 후의 이름이며,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4]

2. 2. 내정 안정

무르실리 2세는 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와 형 아르누완다 2세가 역병으로 사망한 후 히타이트 왕위에 올랐다. 그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얕보였고, 즉위 직후 히타이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북쪽의 카슈카족, 동쪽의 아찌(하야사), 서쪽의 알자와국, 남동쪽의 아시리아 등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무르실리는 징벌 원정을 반복해야 했다.

무르실리는 연대기에 적들의 경멸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너는 아이와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너의 나라는 이제 폐허가 되었고, 너의 보병과 전차 부대는 적다. 너의 보병에 맞서 나는 많은 보병을 가지고 있고, 너의 전차 부대에 맞서 나는 많은 전차 부대를 가지고 있다. 너의 아버지는 많은 보병과 전차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인 너는 어떻게 그에게 맞설 수 있겠는가?"[2]

무르실리 2세는 즉위 초반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행동과 외교를 통해 아버지에 걸맞는 인물임을 증명했다. 그는 재위 7년째까지 카슈카족을 거의 진압하고 알자와를 대체로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또한, 무르실리는 치세 처음 몇 년 동안 각지 점령지에서 주민 10만 명 이상을 강제로 히타이트 본국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는 본국이 역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고통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 3. 군사적 업적

무르실리 2세는 히타이트의 왕 아르누완다 2세가 요절한 후 왕위에 올랐다. 아르누완다 2세는 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1320년경 하티를 휩쓴 전염병의 희생자였다. 무르실리 2세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티의 적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그의 치세 동안 수많은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가장 심각한 반란은 아나톨리아 산악 지대의 카스카족과 남동 터키의 아르자와 왕국에서 일어났다.[2]

무르실리 2세는 자신의 연대기 문서에 적들의 비웃음을 기록했다.[2] 그는 젊고 경험이 없었지만, 히타이트 왕권을 잡았을 때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며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였다.[2]

그의 치세 초기 10년간의 연대기가 남아있는데, 즉위 후 처음 2년 동안 왕국의 북쪽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카스카족을 상대로 징벌적 원정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르자와 왕 우하지티의 공격에 대항했다. 우하지티는 히타이트 동맹국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연대기는 또한 무르실리 2세가 카스카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려 할 때, 즉 왕이 된 지 10년째에 "태양의 징조", 즉 일식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5]

무르실리 2세의 재위 9년, 그의 술 시중관 누반자가 가누바라 전투에서 하야사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후, 동부 아나톨리아의 하야사-아찌는 히타이트의 봉신이 되었다.

2. 4. 외교 정책

무르실리 2세는 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1330년대에 역병으로 사망한 아르누완다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히타이트 왕위에 올랐다.[2] 그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티의 적들에게 경멸을 받았으며, 그의 통치 초기에는 아나톨리아 산악 지대의 카스카족, 서남 소아시아의 아르자와 왕국, 동부 아나톨리아의 하야사-아찌 연맹 등 수많은 반란에 직면했다.[2]

무르실리는 자신의 연대기에 적들의 경멸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너는 아이와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너의 나라는 이제 폐허가 되었고, 너의 보병과 전차 부대는 적다. 너의 보병에 맞서 나는 많은 보병을 가지고 있고, 너의 전차 부대에 맞서 나는 많은 전차 부대를 가지고 있다. 너의 아버지는 많은 보병과 전차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인 너는 어떻게 그에게 맞설 수 있겠는가? (종합 연대기, AM 18–21)[2]

하지만 무르실리 2세는 젊고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했으며, 군사적 행동과 외교를 통해 아버지에 걸맞는 인물임을 증명했다.[2]

그의 치세 첫 10년 동안의 연대기가 남아 있는데, 즉위 후 처음 2년 동안 왕국의 북쪽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카스카 부족을 상대로 징벌적인 원정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왕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르자와 왕 우하지티의 공격에 저항했는데, 우하지티는 히타이트의 동맹국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의 재위 9년째에, 그의 술 시중관 누반자가 가누바라 전투에서 하야사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후 하야사-아찌는 히타이트의 봉신으로 전락하게 된다. 연대기는 또한 그가 하야사-아찌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 해, 즉 왕으로서의 10년째에 "태양의 징조", 즉 일식이 일어났음을 밝힌다.

무르실리 2세는 여러 설형 문자 텍스트에서 그의 외교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5]

문서 번호내용
CTH 62아무루의 두피-테슈프와의 조약 (아카드어, 히타이트어)
CTH 63누하셰와 바르가 간의 국경 분쟁에 대한 법적 판결 및 아무루의 두피-테슈프와의 합의
CTH 64우가리트와 무키시 사이의 국경을 확정하는 칙령
CTH 66우가리트의 니크메파와의 조약
CTH 67하팔라의 타르가스날리와의 조약
CTH 68미라와 쿠왈리야의 쿠판타-쿠룬타와의 조약
CTH 69세하의 마나파-타르훈타와의 조약
CTH 72시리아에서 이집트와의 갈등에 대한 보고서



슈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아모리 왕국에 확보해두었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모리 왕 투피 테슈프에게 히타이트의 종주권을 확인시키고 이집트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데 힘썼다. 이집트에서는 당시 아멘호테프 4세 사후 왕위를 계승한 스멘크카라와 투탕카멘 시대에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고, 무르실리 2세는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성공한다.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요충지 에마르 시를 카르케미시 부왕의 지배하에 두고 시리아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재위 12년째에는 이집트 왕 호렘헤브와 조약을 맺어 아모리 지배를 인정받았다.

2. 5. 무르실리의 일식

무르실리 2세의 재위 10년에 일어난 일식은 히타이트의 절대 연대를 확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일식의 가능한 날짜는 기원전 1312년 6월 24일 또는 기원전 1308년 4월 13일, 단 두 날짜뿐이다.

대부분의 히타이트 학자들은 기원전 1312년의 일식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무르실리 2세가 원정을 벌이던 중 정오 무렵 펠로폰네소스 지역과 아나톨리아 상공에서 거의 완전한 일식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기록 때문이다. 반면, 기원전 1308년의 천문 현상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하여 북동쪽으로 이동했고,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최대 영향을 미쳤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오전 8시 20분경에 발생하여 덜 눈에 띄었다.[2]

하지만 트레버 R. 브라이스(1998)는 기원전 1308년의 일식을 주장했고, 폴 오스트롬(1993) 역시 후기 날짜를 제시했다.

2. 6. 말년과 죽음

무르실리 2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이자 아르누완다 2세의 동생으로, 아르누완다 2세가 역병으로 요절한 후 히타이트 왕국을 다스렸다.[4] 그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적들에게 얕보였으나, 실제로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자신의 권한으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였다. 만약 그가 어렸다면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른 조치가 취해졌을 것이다. 무르실리 2세는 군사적, 외교적 역량에서 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 못지않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치세 초반 10년간의 기록에 따르면, 즉위 후 첫 2년 동안 왕국의 북쪽 경계를 보호하기 위해 카스카족에 대한 정벌을 수행했다. 이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르자와 왕 우하지티의 공격에 대응했는데, 우하지티는 히타이트 동맹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무르실리 2세의 연대기에는 그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는 해에 카스카족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려 할 때 태양의 징조, 즉 일식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천문학적 계산을 통해 기원전 1335년 또는 1312년에 해당하며, 무르실리 2세가 기원전 1320년경에 즉위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무르실리 2세의 통치 기간은 최소 22년으로 확인되지만,[4] 25년에서 27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는 기원전 1295년경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무와탈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무르실리 2세는 첫 번째 부인 가술라와야와의 사이에서 무와탈리 2세, 하투실리 3세, 할파술루피 등 세 아들을 포함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마사나우찌(이집트 왕 람세스 2세와의 서신에서는 마타나자라고 불림)라는 딸은 종속국의 통치자인 마스투리와 결혼했다.[6] 무르실리 2세는 두 번째 부인 타누헤파와의 사이에서도 아들들을 더 두었으나, 이 아들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6]

무르실리 2세의 아들 무와탈리 2세를 통해, 무르실리 2세는 왕국을 통치했던 손자 무르실리 3세를 두었으며, 마아트호르네페루레 여왕과 투달리야 4세 또한 무르실리 2세의 손자녀였다.

왕비인 Gassulawiya|가술라와야영어는 무르실리 2세의 재위 9년째에 사망했다. 무르실리 2세는 다음으로 타누헤파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나중에 무르실리에 의해 추방되었다. 무르실리 2세의 자녀로는 무와탈리 2세, 하투실리 3세, 할파 술피라는 세 아들과 여러 딸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무와탈리 2세하투실리 3세는 무르실리 2세 사후 왕위에 올랐고, 할파 술피는 전차대장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딸 중 한 명은 정략 결혼으로 아르자와국의 왕자 무슈필루와에게 시집갔다.

4. 평가 및 영향

무르실리 2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이자 아르누완다 2세의 동생으로, 아버지와 형이 모두 역병으로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역병 퇴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신에게 탄식하는 모습은 구약성서의 욥기와 비견되며 최고(最古)의 문학 작품으로도 평가받고 있다.[1]

5. 대중문화

무르실리 2세는 일본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아나톨리아 스토리)에 등장한다. 만화에서는 카일 무르실리 2세로 나오지만 실제 "카일"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에서 모티브를 따왔기에 등장인물, 사건, 주변 상황이 비슷하다. 예를 들어 자난자가 이집트에 가다 살해당하는 사건, 바빌로니아 왕녀 등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사실과는 다른 점들도 있다. 만화와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왕의 왕비가 시어머니 황태후에게 대적하다 의문사 당한다. 그 후 무르실리 2세는 황태후가 왕비를 저주했다고 유폐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또한 만화 속 주인공 '유리'의 모티브는 부인이었던 가술라위야이나, 실제 성격이나 행동은 자신의 아들 하투실리 3세의 왕비 푸투헤파를 더 많이 닮았다. 푸투헤파는 지방 하급 귀족의 딸이자 이슈타르 신전 신녀에서 정비로 올라섰고 왕에게 정치적으로 큰 도움이 된 인물이다.

시노하라 치에의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아나톨리아 스토리)는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제국 수도 하투사로 마법에 의해 소환된 15세 일본 소녀 스즈키 유리를 주인공으로 한다. 유리는 나키아 여왕에 의해 소환되었는데, 나키아는 유리를 산 제물로 삼으려 한다. 유리의 피는 땅의 왕자들에게 저주를 걸어 그들을 죽게 하여 나키아의 아들 유다를 왕위의 유일한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핵심 요소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유리는 나키아의 음모에서 여러 번 벗어날 뿐만 아니라, 여신 이슈타르의 화신으로 숭배받게 되고 카일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무르실리 2세는 카일 무르실리 왕자로 묘사된다. 결국 유리는 과거에 남기로 결심하고, 유다가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으로 왕위 계승을 포기한 후, 카일과 유리는 하투사의 통치자로 등극한다.

자넷 모리스는 수필룰리우마 1세를 소재로 한 상세한 전기 소설 ''나는 태양이다''를 썼다. 무르실리 2세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모든 등장인물은 역사적 기록에서 가져왔다. 제리 푸르넬 박사는 이 소설을 "역사 소설의 걸작"이라고 칭했으며, 히타이트 학자이자 ''히타이트인''의 저자인 O.M. 거니는[7] "저자는 히타이트 문화의 모든 측면에 정통하다"고 평했다.[8]

무르실리 2세는 그레아 알렉산더의 ''아마르나 삼부작'' 세 권 모두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시리즈에서 무르실리는 아버지의 텔레피누스 칙령 배신과 자난자 사건 이후 히타이트인들에게 닥친 재앙으로 인해 신들을 달래고 그들의 호의를 되찾는 데 집착하게 된다.

무르실리 2세는 고든 도허티의 소설 ''청동 제국의 지배자: 이슈타르의 아들''(2019)에서 중요한 존재로 등장하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르실리의 셋째 아들 하투실리 3세이다.

참조

[1] 서적 The Ancient Near East: c.3000–330 BC, Volume On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
[2] 문서 Bryce, p. 208 2022-04
[3] 웹사이트 Total and Annular Solar Eclipse Paths: -1319 – -1300 (1320 BCE–1301 BCE) http://sunearth.gsfc[...] NASA 2006-03-29
[4] 문서 Bryce, The Kingdom of the Hittites: New Edition (2005), p. 215 (two references to Mursili II's "twenty-second year").
[5] 웹사이트 Muršili II https://www.hethport[...]
[6] 논문 How Old Was Matanazi?
[7] 서적 The Hittites Penguin
[8] 서적 I, the Sun D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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